본문 보기
스스로를 영국 해군의 엘리트라고 자부한 순양전함 부대의 장교들은 '속사'를 즉시 받아들였고, 순양전함들은 곧 발사 속도 신기록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론적 근거는 간단했다 순양전함 부대의 기함 함장인 어니 챗필드가 타군에서 근무하는 오랜 친구에게 설명한대로, "맞건 빗나가건, 포탄을 가장 많이 날리는 쪽이 - 상대방은 포탄을 쏘는 쪽을 제대로 볼 수도 없기에 - 우위를 획득하고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순양전함들이 의심할 여지없이 전 함대에서 가장 빠르게 포를 쏘는 함정들이긴 했지만, 동시에 사격 정확도에서는 최악의 기록도 함께 보유하고 있었다. 1915년 말에 젤리코 대장은 비티에게 최근의 실탄 사격 훈련에서 보여준 형편없는 결과에 대한 그의 우려를 표명했다. 비티는 그의 함정들이 잘 쏘지 못했음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두 제독이 동의한 주원인은 사통 요원들, 특히 측거의 요원들의 단순한 훈련 부족이었다. 포스강 어귀의 로시스에 주둔한 비티의 함정들은 스카파 플로우의 주 사격 훈련장에서 200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고, 따라서 그랜드 플릿의 전함들에 비해 실탄 사격 훈련을 할 기회도 부족했다. 그러나 장전 훈련은 어디서나 할 수 있었고, 덕분에 순양전함들은 '함대 내에서 가장 빠르게 사격하는 함정' 기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순양전함 부대의 장교들이 그들의 떨어지는 명중률을 상쇄시키기 위해 속사를 얼마나 장려했는지 구체적인 정도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경향이 있었던 증거는 존재한다.
1915년 11월 18일, 젤리코는 비티에게 "(순양전함 부대 내에서) 속사 지향이 너무 극단적인 것 같다" 고 우려를 표했다. 이 가벼운 질책이 두 사람 사이의 말다툼으로 발전했다. 3일 후 비티는 상급자(*젤리코)에게 '속사를 주제로 한'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난 이 주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우리가 더욱 빠르게 사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격 속도를 낮추는건 언제라도 가능하지만, 사격 속도를 높이는건 훈련 없이는 불가능하다." 젤리코는 유화적인 태도로 이렇게 답했다. "나 역시도 속사를 중시한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퀸 메리처럼 너무 빨리 속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만약 근탄이 난다면 괜찮은 일이지만, 원탄이 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젤리코의 걱정스러운 지적은 순양전함 부대에는 눈에 띌만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2월 15일에 비티는 더 집중된 사격을 위해 명중률을 높이려고 노력하지 않고, 다음 실탄 사격 훈련 기회도 상대를 초기에 격파하기 위해 '더 빠른 사격'을 훈련하길 원한다고 보고했다. 그는 계속 "예전에 말한대로, 집중은 사치다. 속도가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한다"라고 단언했다. 이 이후 비티와 젤리코간의 대화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하지만 1916년 5월 7일, 유틀란트 해전 3주 전에 비티는 또 다시 실망스러운 포격전 훈련 점수를 젤리코에게 보낸 것으로 어느 정도 짐작은 가능하다. 타이거의 명중률은 이번에도 너무 나빠서 함장은 견책처분을 받았다.
사격 속도를 높이고 장약고의 정체를 줄이며 함포로의 장약 공급 지연을 방지하기 위해 탄약고 복도의 클라크슨 케이스를 열어놓고, 코다이트 장약을 포탑 바닥의 취급실에 노출된채 쌓아둔데다 포실 바로 아래의 환장실에도 보관한채 교전에 돌입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위험한 조치가 가장 잘 나타난 문서는 1915년 6월, 비티의 기함인 순양전함 HMS 라이온의 포술장으로 배치된 알렉산더 그랜트 준위(후일 대령까지 진급)가 남긴 것이다. 이 기록에서 그는 그가 착임한 날 탄약고의 혼란상을 보고 당황했다고 쓰고 있다.
"함포의 코다이트는 원통형의 케이스에 의해 공급되는데, 각 케이스에는 절반치 장약을 넣게 된다. 케이스에는 케이스에 하나, 그리고 두 뚜껑에 각각 하나씩 3개의 일련번호가 찍혀있어서 두개의 장약과 세개의 일련번호가 일치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조사 결과 탄약고 네군데 모두, 대부분의 케이스들에는 서로 다른 다섯개의 일련번호가 모여있었다. 난 하루 종일을 탄약고 속에서 보냈고, 결국 모든게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탄약고를 비워야만 했다."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이유를 나중에 포원에게 듣고 그랜트는 몹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해 초, 임박한 전투에 대비해
"탄약고 요원들은 열의에 가득차, 담당하는 포가 장약을 기다리는 일이 없도록 모든 케이스의 뚜껑을 제거해버리고, 핸들링 룸을 장약으로 가득 채워 놓았다. 여기에다 그들은 네개의 탄약고 모두 좁은 복도에도 장약을 더 쌓아 놓았다."
"포 요원들이 이 모든 준비를 하면서 '그놈들이 올테면 오라고 해라. 우리가 얼마나 준비를 잘 해 놨는지 알게 될거다'라며 만족해하는 모습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랜트가 회상했다.(아마 코다이트 장약을 일련번호까지 맞춰 원래 상자에 넣는건 너무 힘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승무원들은 그들의 준비가 함정을 대단히 위험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했다." 포술장의 추가 조사로 '포탑장'-보통 중위*1나 선임사관후보생*2이 맡는 - 들이 이런 위험한 행동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묵인 했음이 밝혀졌다. 결국 그랜트는 라이온의 선임 포술 장교 - 소령 - 에게 노출된 코다이트를 쌓아둬서 참사가 일어날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장약고 요원들이 적절한 장약 공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시범으로 보여준 후에야 보다 안전한 방식을 도입할 수 있었다.
비록 유틀란트 해전 전에 라이온에서는 그랜트가 안전 규칙을 엄수하도록 만들수 있었지만, 그에게는 다른 함정에 대해서는 이런 조치가 적용되도록 할 권한이 없었고, 그의 경고는 함대의 나머지 함정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다. 전투 직후, HMS인빈시블의 생존 포술 장교인 후버트 단로이터 중령은 제3해군경에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도, 그의 포원들도 마찬가지의 워험천만한 장약 취급 방법을 사용했다고 인정했다. 다른 증거들을 봐도 유틀란트 해전 당시 순양전함 부대의 대부분의 함정들은 마찬가지로 "부주의했다". 젤리코의 그랜드 플릿의 전함들 중 일부도 마찬가지였다. 조선과 대위였던 빅터 셰퍼드(1951년에서 1958년까지 해군 설계국장으로 근무한)도 유틀란트 해전에 참가했는데, 짧은 전함간 교전에서 144발의 포탄을 날린 HMS 아진코트에서도 마찬가지 모습을 보았다. 전투 동안 셰퍼드는 피해복구팀의 보조로 선내를 돌아다녔다. 그는 다수의 장약이 케이스에서 꺼내진채 무방비 상태로 포탑의 작업 공간에 널려 있어서 놀랐다고 보고했다. 흥미롭게도 어떤 포탑들은 다른 포탑들보다 더 형편없었다. 셰퍼드는 해병대가 담당한 포탑이 특히 나빴다고 보고했다.
흥미롭게도 유틀란트 해전에서 포탑에 명중탄을 맞은 후 폭발해버런 세척의 순양전함 중 인빈시블과 퀸메리 두척은 영국 해군 내에서 가장 빨리 사격을 하는 함선으로 알려져 있었다. 심지어 독일측에서도 퀸메리의 '믿어지지 않는 속도의' 발사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포탄들은 항상 못미치거나, 지나쳐갔다 - 이 빗발치는 포격 중 단 두발만이 순양전함 델플링거에 명중했고, 그나마 각각 한번에 한발씩만 명중했다." 비티가 유틀란트 해전 중 휘하 함정들에게 더 빨리 쏠 것을 장려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순양전함간의 전투가 벌어진 후 7분 후 (극히 원거리에서) 비티는 '모든 함정은 발사 속도를 높일것'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순양전함 HMS 뉴질랜드는 이 명령을 문자 그대로 수행했다. 12인치 함포의 짧은 사정거리에다(따라서 전투 중 상당한 시간동안 사격을 못했다) 구식으로 신뢰성이 떨어지는 사격 통제장치를 장비하고, 4개의 포탑 중 3개만으로만(선체 중심선상에서 빗겨난 두개의 외측 포탑의 위치 때문에) 사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는 전투 내내 총 422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이같은 사격 속도에 근접한 다른 함정은 없었다. 뉴질랜드 바로 앞에 위치한 타이거는 더 사정거리가 긴 13.5인치 함포를 장비한데다 동시에 4개의 포탑으로 사격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총 303발만을 발사했을 뿐이었다. 뉴질랜드 뒤에 위치한 인디파티거블은 비티의 부대에서 12인치 함포를 장비한 2척 중 다른 1척이었는데, 가장 먼저 폭침되고말았다. 그러나 이같은 뉴질랜드의 맹렬한 포격의 결과는 놀랄만한 명중률이었다. 적에게 발사된 422발의 포탄 중 2발(혹은 3발)만이 명중했다. (3발이 명중했을 경우에도 0.7%의 명중률) 아마 적의 반격으로 뉴질랜드에 명중한 포탄은 단 한발뿐이었음이 다행이었을 것이다.
*1 Junior lieutenant. 영국해군에는 '소위'에 해당하는 계급이 없다.
*2 Senior midshipman. 정식 사관이 되면 곧바로 Junior lieutenant가 된다.
2005/02/15 13:16
2005/02/15 13:16
트랙백 주소 :: http://danew.net/warship/trackback/50
트랙백 RSS :: http://danew.net/warship/rss/trackback/50
-
Subject: 네이비필드에서 영국포병의 양극화 현상은 고증이다.
Tracked from 천사고양이의 부덕하고.. H한.. 애기. 2005/02/16 19:07 삭제???의 군함 이야기 ~ '빌어먹을 배'인가? '빌어먹을 시스템'인가? (4) ???님의 블로그에서 퍼온 것입니다. 저것을 읽는 순간... 영국포병의 양극화 현상에 나름대로 납득이 가더군요. 명중은.. 전혀 ?


댓글을 달아 주세요
댓글 RSS 주소 : http://danew.net/warship/rss/comment/50명중률을 무시한 연사의 처절한 결과를 잘 알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이것을 맥자게로.. 링크해도 될까요.
네필에 비유하면.. 도대체.. 이해 안가는.. 영국 명중,연사포병 비교가 되어서요.
본문 전체를 퍼가시는게 아니라 URL만 올리시는거라면 상관없습니다.
먼저 치는 것이, 세게 치는 것이, 또 쉬지 않고 내려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지금이야 위의 요소에 장약 관리 소홀이란 문제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결과적으론 안 좋았다고 쉽게 판단이 가능합니다만 속사 자체는 좋다고 생각됩니다.
- 라이온의 그랜트 쵝오-_-v -
속사를 중시하다가... 유틀란드에서.. 탄약 유폭으로 들어간 배들이.. 많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안 좋은 것이죠
글쎄요..천사고양이님 제 말을 잘못 이해하셨는거 같은데 제 말은 속사를 위해 안전규정을 무시한것이 폭침의 원인이긴 하지만 사실 승리를 위해서는 속사 자체는 매우 권장되어야 하며 상당히 중요하단 것이죠.
전함의 대구경포라는것은 보병의 소총처럼 보고 맟춘다기보단 적함의 예상 위치를 계산해서 쏘아대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차례의 포격으로 협차를 얻은 이후에야 일제사격된 포탄의 한두발이 그 범위내에 명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에서는 먼저, 세게, 쉬지않고 발사하는것이 당연히 먼저 협차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명중률을 무시한 연사의 처절한 결과라는 말씀도 좀 어폐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높은 명중율을 위해서는 재빨리 협차를 해야 되고, 레이더따위가 없던 시기에 그러기 위해선 저쪽보다 더 빨리 포탄을 날려서 탄착점을 관찰한 다음 정확한 후속탄을 날리는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비티가 이렇게 많이 생각했던 듯-_-하며, 개인적으로는 저도 동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안전을 무시하고서라도 빠른 발사속도로 먼저 명중탄을 줄 수 있다면 승리한다는게 당시 영국 해군의 생각(비티의?)이었던것 같습니다만 독일함의 방어력과 안전 대책쪽이 영국의 예상보다 강했달까요.
저때 사람들은 오토 메라라 수퍼 래피드포 같은 물건을 보면 경악하겠군요;; 하기사 수퍼 래피드야 소구경이니.
말씀대로 빠른 발사=빠른 협차로 이어지면 좋은 일입니다만, 비티의 순양전함들은 명중률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빠른 발사를 중시했다는게 문제겠죠. 방법에 집착하다보니 목적을 망각해버린 꼴입니다. 더구나 젤리코의 지적에서 볼 수 있듯이 속사 강조로 인한 저조한 명중률의 문제점은 충분히 노출된 상태였고 말입니다.
전함 부대의 명중률과 비교해 봐도 순양전함 부대의 저조한 명중률은 독일 함정의 방어력 탓으로 돌릴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뭐, 3인치라면 이 당시에는 대함무장으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다고 봐야겠죠. 2차대전 직후 대형함의 탑재포로 3인치가 재등장한게 대공포로서의 역할이었으니까요.
그러고보니 오토 메라라 수퍼 래피드를 자주대공포로 만든 게 있었죠;;; 아무도 채용할 생각은 안한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