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순양전함의 상실에 대해 충분한 장갑 방어를 실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설계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시각이다. 1914년 무렵 영국 해군에 채택된 전술, 작전, 그리고 사격 절차 등은 함정들이 설계될 때에 비하면 크게 변해 있었다. 달리말해, 순양전함들은 전쟁 중 그들이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1914년 이전 영국 해군 내에서(그리고 다른 해군에서도)는 캡을 씌운 철갑탄의 개발으로 중장갑은 불필요하다고 여겨졌다. 예상 교전 거리인 10000야드 이내에서는 새로운 포탄을 막아낼만한 두께의 장갑을 장착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 따라서 미래의 군함은 고폭탄을 막을만한 두께의 장갑만을 필요로 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6-8인치의 장갑이 적절했다. 이같은 발상의 지지자 중에 1904년에서 1910년까지 영국 해군의 수장이었고, "설계 위원회"의 설립자이자 1905년 설계 위원회의 의장으로 최초의 순양전함인 HMS 인빈시블과 노급 전함의 원조인 HMS 드레드노트의 세부 요목을 작성한 해군 대장 존 피셔 경이 있었다. 하지만 이 발상을 전적으로 피셔 스타일의 이론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피셔의 가장 격렬한 비판자 중 하나인 레지날드 쿠스탄스 대장도 이 이론을 지지했던 것이다.
1912년 4월, 피셔가 은퇴한지 2년도 더 지난 후 당시의 해군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피셔에게 그의 주 조언자도 이젠 캡을 씌운 중포탄이 중장갑을 비효율적으로 만들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알려줬다. "지금까지 적 포탄을 막아내도록 설계되어온 포탑은 이젠 적 포탑에 명중하더라도 피해를 국한시키는 역할만을 수행한다"고 처칠이 보고했다. "귀하가 치른 논쟁이 내가 캘빈 경의 지원하에 치른 1905년 설계 위원회에서의 비공식 구두 논쟁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점이 그저 놀라운 뿐입니다"라고 피셔가 답했다.하지만 1913년에는 해군성의 의견이 번복되어 새로운 영국 주력함들은 더 두꺼운 장갑을 장비하게 되었다. 다음해에 추세는 또 바뀌었다. 전쟁 전 1915/16년 건조 계획으로 예정된 전함 아진코트는(하지만 개전으로 취소되었다)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의 28노트 버전으로, 12인치 장갑 대신 10인치 장갑을 장비하고 있었다.
일단 전쟁이 1914년 8월 시작되자, 전함간의 교전이 예상보다 훨씬 원거리에서 진행된다는 것이 곧 분명해졌다. 이 사실의 의미는 간단히 말해서, 일반적인 12인치 포탄은 전함의 12인치 중장갑을 10000야드에서는 관통이 가능하지만, 16000야드는 관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12인치 포탄은 16000야드에서도 순양전함 측면의 6-9인치 장갑은 관통이 가능했다. 대공사를 치르지 않고는 주력함의 장갑을 추가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전쟁 중인 영국 해군이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된 후에는 비록 코다이트의 불안정성이 완전히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더 안전한 장약을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포탑 내의 방화시설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코다이트 취급 수칙이 엄격히 지켜졌다면 장약고 폭발을 막기 위해 이런 조치들이 꼭 필요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최근의 한 역사학자는 1916년 전에는 "인화한 장약의 화염이 탄약고에 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 조치들"이 분명히 불충분했다고 주장했다. 비록 영국 승무원들이 포탑 내에 한번에 8개(방화시스템이 대응하도록 설계된) 이상의 장약을 놔두지 않더라도 8개의 장약이 동시에 점화되면 탄약고 격벽을 찢기에 충분하고, 결국 장약고 전체가 폭발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을 검증하는 것은 저자가 그의 소스에 대해 주석을 달지 않았기에 불가능하다. 더구나 1917년과 1918년 사이 영국 해군이 전노급 전함 벤전스와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사용한 실험에 대한 문서들은 그 주장에 반대되는 것이다. 나아가 전쟁 직후 해군 참모부에서 쓴 보고서에 따르면 이 실험들은 "이미 실전에 투입 중인 함정들에 채택된 방화시설들이 비록 개선의 여지는 있지만 충분히 효과적임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참모부에서 인정한 바에 따르면 "유틀란트 해전은 우리 포탑들이 화염 방지 면에서는 몹시 위험하다는 점을 잘 보여줬는데, 이는 속사를 위해서는 장약고 문을 계속 열어놓은채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순양전함들이 규정상의 8개 장약보다 훨씬 많은 장약을 포탑 내에 쌓아두고 있었다는 압도적인 증거에 비하면 1916년 당시 영국의 방화대책이 충분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그 중요성이 제한적이다. 전쟁 한참 전부터, 그리고 의도적으로 승무원들에게 속사를 위한 훈련을 실시하기 전부터 영국함대 내에서는 주 탄약 공급 시스템 외에 보조 호이스트와 대기 장소에도 탄약을 준비해두는 것이 표준 절차였다. 이는 각 포탑 내에 최소한 12개의 장약이 보관됨을 의미한다. 인디파티거블은 환장실에 즉응용 장약 상자를 준비해 두고 있었기에 당연히 포탑 내에 더 많은 장약을 탑재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포탑 내의 "허가외"장약 보관량에 더해져야 한다. 알렉산더 그랜트에 따르면 승무원들은 코다이트 케이스의 뚜껑을 모두 제거해 둔 상태였고, 취급실은 장약으로 가득차 있었다. 따라서 25개나 30개, 많게는 40개까지의 장약이 화염에 노출되어 있었을 것이다. 25개의 장약의 폭발은(3톤 조금 못미치는) 단순환 화재 이상을 만든다. 아마 그 결과는 함정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한 폭발일 것이다.
물리적 증거도 없고, 유틀란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나에 대한 중요한 증거도 은폐된데다 남아있는 문서들이 지닌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순양전함 부대의 포격 요원들에게 불리한 강한 정황증거가 남아있다. 그 문서를 읽은 사람은 1916년 이전, 속사에 대한 강조를 놓칠 수가 없다. 또한 대부분의 순양전함들에서 속사에 대한 강조가 코다이트를 포탑 내의 작업 공간에 쌓아놓는 위험스러운 경향을 낳았다는 증거가 있다. 그 증거는 유틀란트에서 세척의 순양전함을 격침시킨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최종 결론을 내리기에는 결정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 증거들이 1916년 헨리 잭슨 대장이 이끄는 해군성 위원회를 설득시키기에는 충분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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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양전함의 상실에 대해 충분한 장갑 방어를 실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설계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시각이다. 1914년 무렵 영국 해군에 채택된 전술, 작전, 그리고 사격 절차 등은 함정들이 설계될 때에 비하면 크게 변해 있었다. 달리말해, 순양전함들은 전쟁 중 그들이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1914년 이전 영국 해군 내에서(그리고 다른 해군에서도)는 캡을 씌운 철갑탄의 개발으로 중장갑은 불필요하다고 여겨졌다. 예상 교전 거리인 10000야드 이내에서는 새로운 포탄을 막아낼만한 두께의 장갑을 장착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 따라서 미래의 군함은 고폭탄을 막을만한 두께의 장갑만을 필요로 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6-8인치의 장갑이 적절했다. 이같은 발상의 지지자 중에 1904년에서 1910년까지 영국 해군의 수장이었고, "설계 위원회"의 설립자이자 1905년 설계 위원회의 의장으로 최초의 순양전함인 HMS 인빈시블과 노급 전함의 원조인 HMS 드레드노트의 세부 요목을 작성한 해군 대장 존 피셔 경이 있었다. 하지만 이 발상을 전적으로 피셔 스타일의 이론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피셔의 가장 격렬한 비판자 중 하나인 레지날드 쿠스탄스 대장도 이 이론을 지지했던 것이다.
1912년 4월, 피셔가 은퇴한지 2년도 더 지난 후 당시의 해군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피셔에게 그의 주 조언자도 이젠 캡을 씌운 중포탄이 중장갑을 비효율적으로 만들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알려줬다. "지금까지 적 포탄을 막아내도록 설계되어온 포탑은 이젠 적 포탑에 명중하더라도 피해를 국한시키는 역할만을 수행한다"고 처칠이 보고했다. "귀하가 치른 논쟁이 내가 캘빈 경의 지원하에 치른 1905년 설계 위원회에서의 비공식 구두 논쟁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점이 그저 놀라운 뿐입니다"라고 피셔가 답했다.하지만 1913년에는 해군성의 의견이 번복되어 새로운 영국 주력함들은 더 두꺼운 장갑을 장비하게 되었다. 다음해에 추세는 또 바뀌었다. 전쟁 전 1915/16년 건조 계획으로 예정된 전함 아진코트는(하지만 개전으로 취소되었다)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의 28노트 버전으로, 12인치 장갑 대신 10인치 장갑을 장비하고 있었다.
일단 전쟁이 1914년 8월 시작되자, 전함간의 교전이 예상보다 훨씬 원거리에서 진행된다는 것이 곧 분명해졌다. 이 사실의 의미는 간단히 말해서, 일반적인 12인치 포탄은 전함의 12인치 중장갑을 10000야드에서는 관통이 가능하지만, 16000야드는 관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12인치 포탄은 16000야드에서도 순양전함 측면의 6-9인치 장갑은 관통이 가능했다. 대공사를 치르지 않고는 주력함의 장갑을 추가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전쟁 중인 영국 해군이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된 후에는 비록 코다이트의 불안정성이 완전히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더 안전한 장약을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포탑 내의 방화시설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코다이트 취급 수칙이 엄격히 지켜졌다면 장약고 폭발을 막기 위해 이런 조치들이 꼭 필요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최근의 한 역사학자는 1916년 전에는 "인화한 장약의 화염이 탄약고에 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 조치들"이 분명히 불충분했다고 주장했다. 비록 영국 승무원들이 포탑 내에 한번에 8개(방화시스템이 대응하도록 설계된) 이상의 장약을 놔두지 않더라도 8개의 장약이 동시에 점화되면 탄약고 격벽을 찢기에 충분하고, 결국 장약고 전체가 폭발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을 검증하는 것은 저자가 그의 소스에 대해 주석을 달지 않았기에 불가능하다. 더구나 1917년과 1918년 사이 영국 해군이 전노급 전함 벤전스와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사용한 실험에 대한 문서들은 그 주장에 반대되는 것이다. 나아가 전쟁 직후 해군 참모부에서 쓴 보고서에 따르면 이 실험들은 "이미 실전에 투입 중인 함정들에 채택된 방화시설들이 비록 개선의 여지는 있지만 충분히 효과적임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참모부에서 인정한 바에 따르면 "유틀란트 해전은 우리 포탑들이 화염 방지 면에서는 몹시 위험하다는 점을 잘 보여줬는데, 이는 속사를 위해서는 장약고 문을 계속 열어놓은채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순양전함들이 규정상의 8개 장약보다 훨씬 많은 장약을 포탑 내에 쌓아두고 있었다는 압도적인 증거에 비하면 1916년 당시 영국의 방화대책이 충분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그 중요성이 제한적이다. 전쟁 한참 전부터, 그리고 의도적으로 승무원들에게 속사를 위한 훈련을 실시하기 전부터 영국함대 내에서는 주 탄약 공급 시스템 외에 보조 호이스트와 대기 장소에도 탄약을 준비해두는 것이 표준 절차였다. 이는 각 포탑 내에 최소한 12개의 장약이 보관됨을 의미한다. 인디파티거블은 환장실에 즉응용 장약 상자를 준비해 두고 있었기에 당연히 포탑 내에 더 많은 장약을 탑재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포탑 내의 "허가외"장약 보관량에 더해져야 한다. 알렉산더 그랜트에 따르면 승무원들은 코다이트 케이스의 뚜껑을 모두 제거해 둔 상태였고, 취급실은 장약으로 가득차 있었다. 따라서 25개나 30개, 많게는 40개까지의 장약이 화염에 노출되어 있었을 것이다. 25개의 장약의 폭발은(3톤 조금 못미치는) 단순환 화재 이상을 만든다. 아마 그 결과는 함정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한 폭발일 것이다.
물리적 증거도 없고, 유틀란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나에 대한 중요한 증거도 은폐된데다 남아있는 문서들이 지닌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순양전함 부대의 포격 요원들에게 불리한 강한 정황증거가 남아있다. 그 문서를 읽은 사람은 1916년 이전, 속사에 대한 강조를 놓칠 수가 없다. 또한 대부분의 순양전함들에서 속사에 대한 강조가 코다이트를 포탑 내의 작업 공간에 쌓아놓는 위험스러운 경향을 낳았다는 증거가 있다. 그 증거는 유틀란트에서 세척의 순양전함을 격침시킨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최종 결론을 내리기에는 결정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 증거들이 1916년 헨리 잭슨 대장이 이끄는 해군성 위원회를 설득시키기에는 충분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2005/03/03 11:17
2005/03/0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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